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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폰 슐리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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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1833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프로이센 육군에서 복무한 독일의 군인이자 전략가이다. 그는 보오전쟁, 보불전쟁에 참전했으며, 1891년부터 1906년까지 프로이센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슐리펜은 슐리펜 계획을 수립하여 2전선 전쟁을 대비했으며, 그의 작전 이론은 20세기 기동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헤레로족 학살을 지지하고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기도 했다. 슐리펜은 1913년 사망했으며, "나에게 강한 우익을!"이라는 유언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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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폰 슐리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06년의 알프레트 폰 슐리펜
1906년의 알프레트 폰 슐리펜
전체 이름알프레트 그라프 폰 슐리펜
출생일1833년 2월 28일
출생지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주 베를린
사망일1913년 1월 4일
사망지독일 제국 베를린
안장지베를린 군인 묘지
배우자1868년 안나 그레핀 폰 슐리펜과 결혼 (1872년 사별)
자녀2명
군 경력
소속 국가프로이센 왕국 (1853–1871)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1871–1906)
군 종류프로이센 왕국 육군, 독일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53년–1906년
최종 계급원수
참전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쾨니히그레츠 전투
보불전쟁
수훈흑수리 훈장
주요 보직
직책독일 대참모부 총장
임기 시작1891년 2월 7일
임기 종료1906년 1월 1일
군주빌헬름 2세
총리레오 폰 카프리비
클로트비크 추 호엔로에-쉴링스퓌르스트
베른하르트 폰 뷜로
전임자알프레트 폰 발더제
후임자헬무트 폰 몰트케 (소)
기타 정보
알려진 업적슐리펜 계획

2. 생애

프로이센의 군인으로, 독일 제국의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독일군의 주요 전쟁 계획이었던 슐리펜 계획의 입안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833년 2월 28일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육군 소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본래 법학을 공부했으나, 1853년 의무 군 복무를 계기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3] 1854년 정식 입대 후 여러 부대를 거쳐 1863년 참모본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866년 보오전쟁과 1870년 보불전쟁에 참모 장교로 참전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후 근위 울란 연대장, 참모본부 국장, 참모차장 등을 역임하며 군 경력을 쌓아갔다. 1891년, 알프레트 폰 발더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취임하여 1906년 퇴역할 때까지 약 15년간 독일군 최고 전략가의 자리를 지켰다. 1903년에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참모총장 재임 중이던 190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에서 발생한 헤레로 전쟁 당시, 현지 사령관 로타르 폰 트로타의 헤레로족과 나마족에 대한 가혹한 말살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4][5][6]

1905년에는 미래의 전쟁에서 프랑스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한 양면 전쟁을 상정하고, 단기간에 프랑스를 격파한 뒤 동부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완성했다. 이 계획은 대 몰트케나 발더제 시기의 작전 계획을 발전시킨 것이었으며, 이후 독일군 군비 증강과 작전 준비의 기본 방향이 되었다.

1906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군에서 물러났으나,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슐리펜 계획의 개정을 계속했다. 1911년에는 명예직으로 원수 계급이 수여되었다. 슐리펜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년 전인 1913년 1월 4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3] 그의 장례식에는 빌헬름 2세 황제가 직접 헌화했다.

슐리펜의 유언으로 "나의 우익을 강하게 하라!(Macht mir den rechten Flügel stark!|마흐트 미어 덴 레히텐 플뤼겔 슈타르크!de)"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그가 고안한 슐리펜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수정된 형태로 실행되었으나, 마른 전투에서 저지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전쟁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장기적인 참호전총력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2. 1. 초기 생애

1833년 2월 28일 프로이센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육군 소장 마그누스 폰 슐리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서 깊은 프로이센 귀족 가문인 슐리펜 가문 출신이었다. 1842년에는 아버지가 있는 슐레지엔(Silesia)의 영지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슐리펜은 군인이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프로이센 사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대신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법학 공부 중이던 1853년, 1년간의 의무 군 복무를 위해 프로이센 육군(Prussian Army)에 입대했다.[3][20] 복무 기간이 끝난 후 예비군으로 편입되는 대신 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정식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는 53년에 걸친 긴 군 생활의 시작이었다.

1868년, 군 생활 15년 만에 사촌인 안나 폰 슐리펜 백작 부인과 결혼했다. 부부는 두 딸을 두었는데, 첫째 딸은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마리 에르네스티네(1869년 출생)였고, 둘째 딸 마리(훗날 수녀가 됨)를 낳은 후 아내 안나는 사망했다. 아내의 죽음 이후, 슐리펜은 가정보다는 군사 업무에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

2. 2. 군 경력

1853년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징병으로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여 1년간 복무했다.[20] 병역 종료 후 사관후보생으로 선발되어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58년 상관의 추천으로 육군대학(General War School)에 입학하여 1861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참모 장교 자격을 얻었다. 이듬해인 1862년 프로이센 참모본부 지형과에 배속되어 지형과 기후가 군사 작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는데, 이는 훗날 그가 전쟁 게임을 수행하고 슐리펜 계획을 포함한 다양한 작전 계획을 구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65년 독일 총참모부에 정식 배속되었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대위 계급으로 쾨니히그라츠 전투에 참전하여 첫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 전투에서 경험한 포위 섬멸전은 이후 그의 전술 교리의 핵심이 되었다. 1868년 파리 주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하노버 제10군단 참모가 되었다.[21] 1870년부터 1871년까지 이어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는 소령 계급의 참모 장교로 참전하여 루아르 계곡에서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전쟁 후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1세의 참모로서 군사사 연구 부문의 책임자를 맡았고, 이후 근위 울란 연대장과 참모본부 부속을 거쳤다. 헬무트 폰 몰트케와 알프레트 폰 발더제 밑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아, 1884년 참모본부 국장에 임명되었다. 1886년 12월 4일 소장으로 승진했고, 1888년에는 몰트케의 은퇴 후 발더제 휘하에서 참모차장(Quartermeistergeneral)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4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891년, 알프레트 폰 발더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893년 1월 27일 기병대장으로 승진했다. 1903년에는 상급대장 계급에 올랐다. 참모총장 재임 중이던 190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에서 헤레로 반란이 발생하자, 슐리펜은 현지 사령관 로타르 폰 트로타가 추진한 헤레로족과 나마족에 대한 대량 학살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인종 전쟁이 일단 시작되면, 한쪽의 완전한 멸절이나 노예화로만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4][5] 트로타가 1904년 10월 2일 발표한 악명 높은 '말살 명령'(Vernichtungsbefehl)에 동의했다. 또한 독일군에 의한 헤레로 여성 살해를 정당화하며 "여성들이 전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부상병들이 자주 겪었던 잔혹하고 끔찍한 순교의 주요 원흉이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6] 베른하르트 폰 뷜로 총리가 독일의 국제적 이미지 손상을 우려하여 개입한 후에야, 슐리펜은 마지못해 트로타의 명령 일부(항복한 헤레로족 사살 명령)를 철회하는 데 동의했다.[6]

1905년, 가상 적국인 러시아 제국프랑스를 상대로 한 양면 전쟁 계획인 슐리펜 계획을 완성했다. 이 계획은 대 몰트케나 발더제의 기존 계획을 발전시킨 것으로, 전쟁 발발 시 모든 전력을 서부 전선에 집중하여 단기간에 프랑스를 격파한 뒤, 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신속히 이동시켜 러시아를 공격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계획의 실행을 위해 독일군은 이동 가능한 중포 개발과 병참 능력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슐리펜은 부하가 탄 말에 차이는 사고를 당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20][3] 당시 그는 "이러면 전장에 나갈 수 없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 부상으로 군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06년 신년, 53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3] 그의 후임으로는 황제 빌헬름 2세의 총애를 받던 소 몰트케가 임명되었다.

퇴역 후에도 슐리펜은 개인적으로 슐리펜 계획의 개정을 계속했다. 1911년에는 명예직으로 원수 계급이 수여되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년 전인 1913년 1월 4일 베를린에서 사망하여 군인 묘지에 안장되었다.[3] 장례식에는 황제 빌헬름 2세가 직접 헌화했다.

베를린 군인묘지에 있는 슐리펜의 묘


슐리펜의 유언으로 "나의 우익을 강하게 하라!(Macht mir den rechten Flügel stark!|마흐트 미어 덴 레히텐 플뤼겔 슈타르크!de)"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슐리펜 계획에서 벨기에를 통과하는 독일군 우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평소 자주 했던 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주치의였던 로프스 군의관에 따르면, 임종 당시 슐리펜은 군사, 역사, 정치, 가족 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상태였으며, 실제 마지막 말은 자신의 병세를 냉정하게 분석한 "작은 원인이 큰 결과를 부른다(Kleine Ursachen, große Wirkungen|클라이네 우어자헨, 그로세 비르쿵엔de)"였다고 한다. 슐리펜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일부 수정된 형태로 실행되었으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좌절되면서 실패했고, 전쟁은 슐리펜이 예상하지 못했던 장기적인 참호전총력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2. 3. 참모총장 재임

1891년 알프레트 폰 발더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취임했다.[21] 1903년에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참모총장 재임 중이던 190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에서 헤레로 전쟁이 발발하자, 슐리펜은 현지 사령관 로타르 폰 트로타가 추진한 헤레로족과 나마족에 대한 대량 학살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인종 전쟁이 일단 시작되면, 한쪽의 완전한 멸절이나 노예화로만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4][5] 트로타가 10월 2일 내린 악명 높은 "말살 명령"(Vernichtungsbefehl|페어니히퉁스베펠de)에도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심지어 독일군에 의한 헤레로 여성 살해 사례에 대해 "여성들이 전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부상병들이 자주 겪었던 잔혹하고 끔찍한 순교의 주요 원흉이었고, 이러한 희생자들의 모습이... 동료들을 용서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게 했다"고 쓰며 정당화하기도 했다.[6] 독일의 국제적 이미지 실추를 우려한 베른하르트 폰 뷜로 총리가 개입한 후에야, 슐리펜은 마지못해 트로타의 명령 철회에 동의했다.[6]

슐리펜은 당시 프랑스(징병률 80%)에 비해 현저히 낮은 독일의 징병률(55%)과 1896년 체결된 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인한 수적 열세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는 이러한 양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보편적 징병제를 도입하고 훈련된 예비군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전투 부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동원 시 예비군을 즉시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대체 대대'(Ersatzbataillone|에어자츠바타요네de)를 여단으로 편성할 것을 1891년부터 제안했으나, 군 지휘권과 징병 정책을 통제하던 프로이센 전쟁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부는 이 부대들이 효과적인 전투력을 갖추기 어렵고, 현역 부대의 손실을 보충하는 역할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슐리펜의 구상은 그가 퇴임한 지 6년 후인 1911년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6개의 Ersatz|에어자츠de 사단을 편성하면서 일부 실현되었다.

1905년, 슐리펜은 가상 적국인 러시아 제국프랑스와의 양면 전쟁 상황을 상정한 작전 계획, 이른바 "슐리펜 계획"을 구체화한 각서(Denkschrift|뎅크슈리프트de)를 작성했다. 이 계획은 대 몰트케나 발더제 시기의 기본 계획을 발전시킨 것으로, 개전 초기에 주력군을 서부 전선에 집중하여 단기간 내에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후 병력을 철도로 동부 전선으로 신속히 이동시켜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독일군은 이동 가능한 중포 개발과 수송 부대 중심의 병참 능력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슐리펜이 이 각서를 작성할 당시 구상했던 96개 사단(이 중 12개는 Ersatz|에어자츠de 사단)은 실제 독일군의 병력(1914년 기준 79개 사단)을 훨씬 초과하는 규모였다. 따라서 이 각서는 실제 작전 계획이라기보다는, 보편적 징병제 도입을 통해 독일이 확보해야 할 군사력을 역설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슐리펜 자신도 이 가상의 병력으로도 프랑스를 완전히 굴복시키기는 어려울 수 있음을 인정했으며, 특히 파리 포위 작전의 어려움을 언급했다. 슐리펜의 실제 전쟁 연습(Kriegsspiele|크릭스슈필레de)이나 배치 계획(Aufmarsch|아우프마르슈de)들은 각서에서 제시된 대규모 우회 기동보다는 반격 교리에 더 중점을 둔 것이었다. 슐리펜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일부 수정된 형태로 실행되었으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좌절되었고 전쟁은 슐리펜이 예상하지 못한 참호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05년 8월, 슐리펜은 동료의 말에 차인 사고로 부상을 입어 군무 수행이 어렵게 되었다.[20] 이듬해인 1906년 초 퇴역했다.[3] 후임 참모총장으로는 콜마르 폰 데어 골츠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황제 빌헬름 2세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황제의 총애를 받던 소 몰트케가 임명되었다.

2. 4. 퇴역과 죽음

1905년 8월, 72세의 나이에 동료의 말에 차여 부상을 입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3] 약 53년간의 복무를 마친 뒤 1906년 신년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은퇴하였다.[3]

퇴역 후에도 개인적으로 슐리펜 작전의 개정을 계속했으며, 군사 잡지에 고대 및 현대 전사(戰史)에 관한 논문을 기고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썼다.[22] 또한 러일전쟁을 연구하여, 정면 공격으로 승리하더라도 성과는 미미하며 격퇴된 측도 곧 전력을 회복하여 저항을 반복하기 때문에 결국 장기전에 빠져든다는 견해를 보였다.[23] 1911년에는 순전히 명예적인 조치로 원수 계급이 수여되었다.[20]

슐리펜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년 전인 1913년 1월 4일 베를린에서 사망하여 군인 묘지에 안장되었다.[3][20] 그의 묘소에는 황제 빌헬름 2세가 직접 헌화하였다.[20]

슐리펜의 마지막 말이 슐리펜 작전과 관련하여 '나에게 강한 우익을 만들라!(Macht mir den rechten Flügel stark!de)'였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슐리펜이 프랑스 공격 계획에서 벨기에를 통과하는 독일군 우익을 가장 중시하여 늘 이 말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20] 이 유언 자체는 허구이며 그의 사후 수십 년 후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3] 주치의인 로프스 군의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임종 시 슐리펜은 군사, 역사, 정치, 가족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산만하게 이야기했으며, 실제 "최후의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병세를 냉정하게 분석한 '작은 원인이 큰 결과를 부른다(Kleine Ursachen, große Wirkungende)'였다고 한다.[20]

3. 슐리펜 계획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독일 제국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임 중이던 1905년에 고안한 작전 계획이다. 이는 장차 독일이 러시아 제국프랑스라는 두 강대국을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치르게 될 가상 상황, 즉 양면 전쟁(Zweifrontenkriegde)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계획은 이전 참모총장들인 대 몰트케나 알프레트 폰 발더제의 기본 구상을 더욱 구체화한 것이었다.

슐리펜 계획의 핵심 목표는 잠재적인 양면 전쟁의 위험을 회피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의 주력군 대부분을 서부 전선에 집중시켜, 단기간 내에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프랑스를 굴복시킨 후에는 독일의 발달된 철도 수송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병력을 신속하게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동원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릴 것으로 예상된 러시아군을 상대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슐리펜과 그 이후의 독일 군부는 이동이 가능한 중포의 개발 및 배치, 그리고 수송 부대를 중심으로 한 병참 능력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슐리펜의 후임자인 헬무트 폰 몰트케(소몰트케)에 의해 일부 수정된 형태로 실행되었다. 실제 전쟁에서는 계획대로 프랑스를 단기간에 제압하지 못했고, 독일군의 공세는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에게 저지되었다. 결국 서부 전선은 슐리펜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길고 소모적인 참호전 양상으로 고착되었으며, 전쟁은 총력전의 형태로 장기화되었다.[24] 이러한 결과는 슐리펜이 실제 군대를 지휘하는 야전 사령관이라기보다는, 탁월한 전략 이론가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음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3. 1. 배경

1833년 2월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육군 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4년 군에 입대했으며, 1863년부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1866년 보오전쟁에는 대위로, 1870년부터 1871년까지 이어진 보불전쟁에는 참모 장교(소령)로 참전했다. 전쟁 이후에는 근위 우란 연대장과 참모본부 근무를 거쳤으며, 1884년에는 참모본부 국장에, 1888년에는 참모본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3. 2. 내용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1833년 2월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육군 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4년 군에 입대하여 1863년부터는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그는 1866년 보오전쟁에 대위로, 1870년~1871년의 보불전쟁에는 참모 장교(소령)로 참전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후 근위 우란 연대장 등을 거쳐 1884년 참모본부 국장, 1888년 참모본부 차장을 역임했으며, 1891년에는 알프레트 폰 발더제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03년에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참모총장 재임 중이던 1905년, 슐리펜은 독일이 장차 러시아 제국프랑스라는 두 강대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게 될 가능성에 대비한 "슐리펜 작전"을 고안했다. 이 계획은 이전 참모총장들인 대 몰트케나 발더제의 기본 구상을 구체화한 것으로, 양면 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핵심 구상은 전쟁 발발 시 독일의 주력군을 서부 전선에 집중시켜 단기간 내에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후 철도 수송을 이용해 병력을 신속하게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슐리펜과 후임 독일 군부는 이동식 중포 배치와 수송 부대 중심의 병참 능력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슐리펜은 계획의 현실성에 대해 여러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징병률이 프랑스(약 80%)에 비해 낮은 55% 수준이라는 점과, 1896년 체결된 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인해 독일이 수적 열세에 놓이게 된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는 독일군의 전술적 우위만으로는 이러한 양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보고, 보편적 징병제 도입과 예비군 전력 강화를 주장했다. 그는 전쟁 발발 시 예비군을 Ersatzbataillonede(대체 대대)로 편성하여 활용할 계획을 세웠으나, 징병 정책을 담당하는 프로이센 전쟁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제안은 그가 은퇴한 후인 1911년에야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에 의해 일부 실현되었다.

슐리펜은 1906년 1월, 은퇴 직전에 작성한 Denkschriftde(각서)를 통해 슐리펜 작전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각서는 실제 작전 계획이라기보다는, 독일이 보편적 징병제를 도입했을 경우 달성 가능한 군사적 목표를 제시하는 성격이 강했다. 각서에서 상정한 96개 사단은 당시 독일의 군사력으로는 확보 불가능한 규모였으며(1914년 실제 동원 사단은 79개), 슐리펜 자신도 이 정도 병력으로 프랑스를 완전히 패배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특히 강력한 프랑스 요새 지대와 파리를 중심으로 한 방어선의 돌파 어려움을 인정하며, 공세 작전의 한계를 지적했다. 계획의 핵심인 강력한 우익 부대에 의한 파리 우회 기동 역시 필요한 병력(12개 대체 사단) 확보와 철도 수송 능력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실제로 슐리펜이 이러한 대규모 기동을 검증하기 위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의 다른 전쟁 계획이나 훈련 기록들은 오히려 '전략적 역공'이라는 방어적 기조 속에서의 공격을 더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서 핵심은 '전략적 역공'이었다. 그는 독일군이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섣부른 공세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대신 우수한 철도망을 활용해 침공해오는 적군을 독일 영토 내에서 효과적으로 격퇴(역공)한 뒤, 신속하게 병력을 다른 전선으로 이동시켜 다시 역공을 가하는 방어 전략을 중시했다. 그는 적을 단순히 격퇴하는 것을 넘어, 포위하고 섬멸하는 적극적인 전술적 공격 자세를 강조했다.

1905년 8월 부상으로 건강이 악화된 슐리펜은 이듬해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황제의 신임을 얻은 헬무트 폰 몰트케(소몰트케)가 임명되었다. 슐리펜은 은퇴 후에도 개인적으로 작전 계획 수정을 계속했으며, 1911년에는 명예직으로 원수 계급을 받았다. 몰트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슐리펜 계획을 수정하여 실행했지만, 병력 부족과 계획의 변경 등으로 인해 독일군의 공세는 마른 전투에서 좌절되었다.[7] 이후 전쟁은 슐리펜이 예상하지 못한 참호전과 총력전 양상으로 흘러갔다.[24] 이는 슐리펜이 실제 야전 지휘관보다는 뛰어난 작전 이론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슐리펜은 1차 세계 대전 발발 1년 전인 1913년 베를린에서 사망했고, 군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에는 황제 빌헬름 2세가 헌화했다. 그의 유언으로 알려진 "나에게 강한 우익을!(Macht mir den rechten Flügel stark!de)"이라는 말은 그가 프랑스 공격 계획에서 우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주 했던 말이지만, 실제 임종 시 마지막 말은 자신의 병세를 분석하며 남긴 "작은 원인이 큰 결과를 부른다(Kleine Ursachen, große Wirkungende)"였다고 전해진다.

3. 3. 수정과 실행

슐리펜은 독일군의 징병률이 낮은 점(프랑스의 80%에 비해 55%)이 수적 불균형을 초래했고, 1896년 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독일의 전술적 및 작전적 능력만으로는 이러한 양적 열세를 만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슐리펜은 보편적 징병제를 도입하고 훈련된 예비군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전투 부대를 창설하고자 했다. 징병 정책은 프로이센 전쟁부가 통제했고, 이는 Reichstag|라이히스타크de(독일 제국 의회)에 보고했다. 슐리펜은 전쟁 발발 시 군 지휘권을 맡아 새로운 부대를 대량으로 창설할 계획이었으며, 동원 시 다수의 예비군은 현역군에 합류할 때까지 대체 대대(Ersatzbataillone|에르자츠바타요네de)에 배속될 예정이었다.

1891년 6월부터 슐리펜은 현역군에서 Ersatzbataillone|에르자츠바타요네de를 여단으로 편성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 부대들이 효과적인 전투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대체 부대를 현역 부대로 사용하는 것은 현역군의 손실을 메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전쟁부는 슐리펜의 제안을 거부했고, 그가 은퇴한 지 6년 후인 1911년에야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6개의 Ersatz|에르자츠de 사단을 편성했다. 그럼에도 슐리펜은 Ersatzbataillone|에르자츠바타요네de의 대량 활용 가능성을 믿었고, 이를 1906년 1월에 발표된 그의 유명한 각서, 즉 '슐리펜 계획'(Denkschrift|덴크슈리프트de)의 기본 가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각서는 실제 작전 계획이라기보다는, 보편적 징병제가 도입될 경우 독일이 달성할 수 있는 군사적 잠재력을 보여주기 위한 이론적 구상에 가까웠다. 슐리펜은 1905년 12월 31일에 은퇴했고, 각서에서 상정한 96개 사단(1914년 실제 독일군은 79개 사단, 서부 전선 배치 68개 사단)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슐리펜 자신도 이 가상의 96개 사단으로도 프랑스를 완전히 패배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세 작전이 많은 병력을 소모시키며, 특히 요새화된 지역에서는 방어군이 강해짐에 따라 공격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각서에서 Ersatz|에르자츠de 부대가 도보 행군으로 우익 부대를 따라잡기 어렵고, 철도 시스템으로도 이들을 파리 방면으로 이동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따라서 이 부대들은 독일 전선의 다른 곳(베르됭과 메지에르 사이, 메츠 또는 모젤강 우안 등)에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슐리펜이 각서에서 제시된 대규모 우회 기동(파리 포위)을 시험하기 위한 훈련을 실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의 실제 배치 계획(Aufmarsch|아우프마르슈de), 참모진 훈련(Generalstabsreisen|게네랄슈타프스라이젠de), 전쟁 게임(Kriegsspiele|크릭스슈필레de) 등은 모두 그의 핵심 교리인 '역공(counter-attack)'과 일치하는 양상을 보였다. 1893년 12월 11일 작성된 각서에서는 전쟁 발발 시 동프로이센의 취약성 때문에 완전 동원을 선포하고, 민병대가 방어선을 구축한 뒤 현역군이 배치되어 침공하는 러시아군을 격퇴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슐리펜의 전쟁 계획의 핵심은 전략적 역공이었다. 그는 방어 작전 중에서의 공격력을 신뢰했으며,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비해 병력이 부족한 독일이 공세를 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았다. 대신 철도를 이용한 신속한 병력 이동으로 프랑스나 러시아의 침공군에 대해 역공을 가하고, 격퇴 후 다른 전선으로 이동하여 다시 역공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1901년의 동부 및 서부 전쟁 게임(Generalstabsreise|게네랄슈타프스라이제de)은 이러한 방어적 승리 개념을 잘 보여준다. 이 훈련에서 독일은 벨기에룩셈부르크를 통해 공격해 온 프랑스군을 라인강 좌안에서의 역공으로 격파했다. 슐리펜은 "적이 방어 성채 뒤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역공 전략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슐리펜은 상황에 따라 공세적 계획의 필요성도 인식했다. 1897년에는 프랑스-독일 국경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전술 계획을 개발했으며, 북쪽 요새선을 우회하여 베르됭부터 남북으로 파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5년의 '슐리펜 계획 각서'(Denkschrift|덴크슈리프트de)는 러시아가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프랑스-독일 전쟁을 가정하고 독일의 공세를 규정한 첫 번째 전략적 공세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네덜란드의 림뷔르흐주와 벨기에 북부를 통과하여 남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확보하고, 프랑스의 역공으로부터 측면을 보호하며 진격하는 대담한 기동을 포함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 군대가 알자스-로렌 방어를 지원한다는 가정도 포함되었다. 슐리펜은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와 열악한 철도 시스템을 고려하여 러시아를 당장의 큰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계획의 두 번째 단계에서 슐리펜은 프랑스의 강력한 "두 번째 방어 지역"(베르됭, 파리 요새, 마른강)을 돌파하기 위해 파리 ''서쪽''에서 센강을 건너 프랑스군을 후퇴시키거나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파리를 포위하고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한 핵심 구상이었다.

하지만 슐리펜의 실제 전쟁 계획들, 예를 들어 ''Aufmarsch II''와 ''Aufmarsch Ost''는 여전히 방어 전략과 역공을 강조했다. 그는 프랑스-러시아 협상국과의 양면 전쟁에서는 방어 전략이 최선이며, 침공군을 단순히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포위하고 공격하여 섬멸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그의 전략은 방어적 틀 안에서 매우 공세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1905년 8월, 슐리펜은 말에 차이는 부상을 입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72세의 나이로 휴가 기간 동안 은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황제의 신임을 받던 헬무트 폰 몰트케(소몰트케)가 임명되었다.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을 수정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실행에 옮겼다. 슐리펜은 자신의 공세 계획(''Aufmarsch I West'')이 병력 부족 때문에 순수한 프랑스-독일 전쟁에서만 유효하다고 경고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몰트케는 이를 독일이 직면한 2전선 전쟁 상황에 적용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파리 서쪽을 우회할 충분한 병력이 부족했고, 독일군의 공세는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의 "두 번째 방어 지역"을 돌파하지 못하고 저지되었다.[7] 이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슐리펜이 예상하지 못했던 참혹한 참호전총력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24] 이러한 결과는 슐리펜이 실제 군 지휘관이라기보다는 뛰어난 작전 이론가였음을 보여준다.

4. 유산과 평가

슐리펜은 군사령관이라기보다 작전 이론가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유산은 러시아 제국프랑스를 상대로 한 양면 전쟁 계획인 슐리펜 작전이다. 이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수정된 형태로 실행되었으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좌절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슐리펜이 예상하지 못했던 참호전 양상으로 전쟁이 전개되었다. 그의 군사 이론과 그 영향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슐리펜 작전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06년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작전 계획의 개정을 계속했다. 1911년에는 명예직으로 원수 계급을 받았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3년 베를린에서 사망하여 군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장례식에는 황제 빌헬름 2세가 직접 헌화했다.

슐리펜의 유언으로 알려진 Macht mir den rechten Flügel stark!|나에게 강한 우익을!de이라는 말은 그가 프랑스 공격 계획에서 벨기에를 통과하는 독일군 우익을 중시하며 자주 했던 말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임종 시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는 기록도 있다. 주치의에 따르면 병상에서 여러 주제를 두서없이 이야기했으며, 실제 마지막 말은 자신의 상태를 분석한 Kleine Ursachen, große Wirkungen|작은 원인이 큰 결과를 부른다de였다고 한다.

4. 1. 군사 이론에 대한 영향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당대 가장 유명한 전략가 중 한 명이었지만, "편협한 군사 학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8]

슐리펜의 작전 이론은 그의 중요한 논문인 ''[https://web.archive.org/web/20070311025853/http://cgsc.leavenworth.army.mil/carl/resources/csi/Cannae/cannae.asp#cannae#cannae 칸나이 전투(Cannae)]''를 통해 20세기 기동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은 기원전 216년 한니발이 로마군을 격파한 칸나이 전투를 분석한 것으로, 슐리펜의 기동, 특히 포위 기동에 대한 개념과 기타 전쟁의 기본 원리를 명확히 기술하고, 참모본부,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 전체를 위한 교육 도구로 활용될 목적으로 쓰였다. 그의 이론은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의 고급 육군 사관학교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미국의 군사 사상가들은 그를 매우 존경하여 그의 주요 저술인 ''칸나이 전투''를 리븐워스 요새에서 번역하여 미국 육군과 학계에 배포했다.

빌헬름 2세 참석 군사 훈련(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슐리펜)


슐리펜은 전임 참모총장 발더제와 달리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전쟁 계획 수립과 독일군의 전쟁 준비 태세 유지 등 참모본부 본연의 업무에 집중했다. 그는 계획 수립, 훈련, 군사 교육, 현대 기술의 군사적 활용, 전략 기획 등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젊은 장교들이 기동 계획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고 계획 후에도 이러한 작전을 지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그의 주요 임무 중 하나로 생각했다.

슐리펜의 전술과 관련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 원정군 최고 사령관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의 참모총장인 월터 베델 스미스 장군은 아이젠하워 장군과 그의 참모진 많은 수가 이러한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결정적인 결과를 위한 이러한 광범위하고 대담한 기동의 개념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했다.[9]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슐리펜의 포위 작전 이론을 적용한 그의 제자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슐리펜을 "역대 가장 위대한 군인 중 한 명"이라고 칭찬했다.[10]

그의 사후 오랫동안, 특히 한스 폰 제크트 장군을 포함한 전간기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참모본부 장교들은 ''번개전'' 교리 개발 과정에서 슐리펜 이론에 대한 지적 영향을 인정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은 슐리펜 계획을 기반으로 했다.[11]

퇴역 후에는 군사 잡지에 고대와 현대의 군사사에 관한 논문을 기고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썼다.[22] 그는 또한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정면 공격으로 승리하더라도 성과는 미미하며, 격퇴된 측도 곧 전력을 회복하여 저항을 반복하기 때문에, 결국 장기전에 빠져든다는 견해를 보였다.[23]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슐리펜을 폄하하여 그의 측근에서 슐리펜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베어마흐트의 공식 편년사가인 발터 셰르프에게 슐리펜의 이름을 어떤 역사서에도 기록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12]

4. 2. 비판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de)은 당대 가장 유명한 전략가 중 한 명이었지만, "편협한 군사 학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8]

그의 대표적인 슐리펜 계획은 러불 동맹으로 인한 양면 전쟁의 위협 속에서 구상되었다. 그러나 계획의 성공에 필수적이었던 징병률 증가와 예비역을 활용한 부대 증강은, 평시 예산 증액에 반대하는 독일 제국 의회의 입장을 고려해야 했던 의 반대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슐리펜은 예비역 병사를 활용한 교체 대대 증강을 주장했지만 이 역시 비용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등장하는 1911년까지 주요 전력 증강은 지연되었다. 결과적으로 슐리펜 계획이 전제로 했던 96개 사단 규모의 병력은 확보되지 못했으며, 슐리펜 자신도 계획 입안 당시 예상대로 사단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프랑스군을 완전히 포위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훗날 나치 정권의 아돌프 히틀러는 슐리펜을 폄하하여 그의 측근에서 슐리펜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하게 하고, 베어마흐트의 공식 편년사가에게 슐리펜의 이름을 역사 기록에서 제외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12]

4. 3.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당대 가장 유명한 전략가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일각에서는 "편협한 군사 학문주의자"라는 비판도 받았다.[8]

슐리펜의 작전예술 이론은 그의 중요한 논문인 ''https://web.archive.org/web/20070311025853/http://cgsc.leavenworth.army.mil/carl/resources/csi/Cannae/cannae.asp#cannae#cannae 칸나이 전투(Cannae)'' 연구를 통해 20세기 기동전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은 기원전 216년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한 칸나이 전투를 분석한 것으로, 슐리펜의 기동전 개념, 특히 포위 기동과 전쟁의 기본 원리를 명확히 설명하고, 참모부와 육군 전체의 교육 자료로 활용될 목적으로 쓰였다. 그의 이론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의 고급 육군 사관학교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었으며, 특히 미국 군사 사상가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주요 저술인 ''칸나이 전투''를 리븐워스 요새에서 번역해 미 육군과 학계에 배포하기도 했다.

슐리펜은 유명한 군사 전략가였지만, 정치에는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전쟁 계획 수립과 독일군의 전쟁 준비 태세 유지 등 참모본부 본연의 업무에 집중했다. 그는 계획 수립에 심혈을 기울였고, 장병 훈련, 군사 교육, 현대 기술의 군사적 활용, 전략 기획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또한 젊은 장교들이 기동 계획을 책임감 있게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삼았다.

그의 영향력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의 참모총장이었던 월터 베델 스미스 장군은 아이젠하워와 그의 참모 다수가 슐리펜의 영향을 받은 사관학교 출신이며, "결정적인 결과를 얻기 위한 광범위하고 대담한 기동 개념"을 수용했다고 언급했다.[9] 탄넨베르크 전투(1914년)에서 슐리펜의 포위 작전 이론을 성공적으로 적용한 그의 제자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슐리펜을 "역대 가장 위대한 군인 중 한 명"이라고 칭송했다.[10]

그가 사망한 후에도, 특히 한스 폰 제크트 장군을 비롯한 전간기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참모본부 장교들은 번개전 교리를 개발하면서 슐리펜 이론에 대한 지적 영향을 인정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 역시 슐리펜 계획에 기반했다.[11]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슐리펜을 탐탁지 않게 여겨 그의 측근들에게 슐리펜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하게 했으며, 베어마흐트의 공식 편년사가에게 역사 기록에서 그의 이름을 제외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12]

5. 수상

'''독일 훈장'''[13]


  • 프로이센:
  • * 철십자훈장(1870), 1등급 및 2등급
  • *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 월계수잎, 반지에 검, 왕관 휘장
  • * 프로이센 왕관 훈장 기사장, 1등급
  • * 호엔촐레른 가문 훈장 대수훈장
  • * 검은 독수리 훈장 기사장, 목걸이 및 다이아몬드 휘장
  • * 1870/71년 전쟁 기념 훈장
  • * 빌헬름 1세 즉위 100주년 기념 훈장
  • 호엔촐레른: 호엔촐레른 공작 가문 훈장 명예십자장, 1등급
  • 바덴: [14]
  • * 차링거 사자 훈장 대십자장, 월계수잎, ''1893''
  • * 충실 훈장 기사장, ''1899''
  • 바이에른 왕국:
  • * 바이에른 왕관 공훈 훈장 대십자장, ''1897''[15]
  • * 성 후베르투스 훈장 기사장, ''1903''[1]
  • * 바이에른 군 공훈 훈장 대십자장
  •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훈장 대십자장, ''1903년 4월 9일''[16]
  • 리페: 리페 가문 훈장 명예십자장, 1등급
  • 메클렌부르크:
  • * 벤디쉬 왕관 훈장 대십자장, 금관 휘장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군 공훈 훈장, 1등급 (슈베린)
  • 올덴부르크: 페터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공작 훈장 대수훈장
  • 작센 왕국:
  • * 알베르트 훈장 대십자장, 금성 휘장, ''1891''[17]
  • * 루 훈장 기사장
  • 뷔르템베르크 왕국:[18]
  • * 뷔르템베르크 왕관 훈장 대십자장, ''1893''
  • * 프리드리히 훈장 대십자장, ''1893''
  • * 뷔르템베르크 군 공훈 훈장 대십자장, ''1903년 3월 28일''


'''외국 훈장'''[13]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9]
  • * 오스트리아 철관 훈장 기사장, 1등급, ''1890''
  • *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훈장 대십자장, ''1891''; 다이아몬드 휘장, ''1895''
  • * 헝가리 성 스테판 훈장 대십자장, ''1897''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장교십자장
  • 이탈리아 왕국:
  • * 모리스와 라자루스 성인 훈장 대십자장
  • * 이탈리아 왕관 훈장 대십자장
  • 네덜란드: 네덜란드 사자 훈장 대십자장
  • 오스만 제국: 오스마니예 훈장, 1등급 다이아몬드 휘장
  • 페르시아:
  • * 8월 초상 훈장
  • * 사자와 태양 훈장, 3등급
  • 러시아 제국: 알렉산더 네프스키 훈장 기사장, ''1897''
  • 시암: 백상 훈장 대십자장

참조

[1] 서적 Columbia Electronic Encyclopedia, 6th Edition 2011-11
[2] 웹사이트 Alfred von Schlieffen Biography & Facts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7-21
[3] 간행물 Understanding Schlieffen 2003
[4] 논문 Ich glaube, dass die Nation als solche vernichtet werden muss: Kolonialkrieg und Völkermord in „Deutsch-Südwestafrika“ 1904–1907
[5] 웹사이트 Less Than Human - Pages 20-40 https://www.jewishge[...]
[6] 서적 m: Absolute Destruction: Military Culture and the Practices of War in Imperial Germany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013-02-15
[7] 논문 Alfred Graf von Schlieffen: Generalstabschef und Militärtheoretiker des Imperialistischen Deutschen Kaiserreiches Zwischen Weltmachstreben und Revolutionsfurcht 1979-07
[8] 서적 Makers of Modern Strategy: From Machiavelli to the Nuclear Ag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9] 서적 Eisenhower's Six Great Decisions: Europe, 1944–1945 https://books.google[...] Pickle Partners Publishing 2014-06-13
[10] 서적 Makers of Modern Strategy from Machiavelli to the Nuclear Ag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10-01
[11] 서적 The Rommel Papers https://ia600901.us.[...] Harcourt, Brace and Co. 1953
[12] 서적 With Hitler to the End: The Memoirs of Hitler's Valet https://archive.org/[...] Skyhorse Publishing 2009
[13] 문서 Rangliste de Königlich Preußischen Armee https://babel.hathit[...] Ernst Siegfried Mittler & Sohn 1912
[14]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https://digital.blb-[...] 1902
[15]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Bayern https://archive.org/[...] 1908
[16] 문서 Großherzoglich Hessische Ordensliste Staatsverlag 1909
[17] 서적 Staatshandbuch für den Königreich Sachsen: 1901 https://babel.hathit[...] Heinrich 1901
[18]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Württemberg https://books.google[...] Landesamt 1907
[19]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2021-01-14
[20] 간행물 Understanding Schlieffen 2003
[21] 서적 戦争史概観
[22] 서적 戦争史概観
[23] 서적 戦争史概観
[24] 논문 Alfred Graf von Schlieffen: Generalstabschef und Militärtheoretiker des Imperialistischen Deutschen Kaiserreiches Zwischen Weltmachstreben und Revolutionsfurcht 197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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